아이의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나 정해진 형식이 없다. 장난감 하나 없어도 종이 한 장, 상자 하나만 있으면 아이는 스스로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 중심에 상상력이 있고, 상상력의 씨앗이 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리고 그림책은 아이의 상상력을 가장 풍부하게 자극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독후활동이 단순한 독서의 연장선에서 끝나지 않고 아이 스스로 놀이로 확장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활동을 넘어 창조적인 사고의 놀이터가 된다.
그림책을 읽은 후 아이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것 이상이다. 책에서 받은 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움직임이나 물건, 공간을 통해 표현하는 복합적인 사고 과정이다. 아이가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어른이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음은 그림책을 기반으로 아이가 자발적으로 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이야기 속 요소를 현실로 꺼내기
아이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현실로 옮기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공룡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읽었다면, 아이는 마치 자기가 공룡이 된 것처럼 행동하거나 방을 정글처럼 꾸미려는 시도를 한다. 이럴 때 어른은 아이의 상상을 지지해주고, 이야기 속 요소를 함께 현실로 끄집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지는 않다. 상자 몇 개를 쌓아 동굴을 만들고, 수건을 덮어 강을 만들 수도 있다. 인형이나 블록을 이용해 등장인물을 직접 재현해보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놀이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를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 “그 장면을 지금 우리 방에서 해보면 어떨까?”와 같은 말은 아이의 상상을 자극하고 주도적인 놀이로 이끌어주는 좋은 질문이다. 이런 놀이가 반복되면 아이는 점점 더 책 속 요소들을 현실로 재창조하는 데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책을 읽는 순간부터 자기만의 놀이를 상상하기 시작하게 된다.
놀이로 이어지는 질문 던지기
아이의 생각을 놀이로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질문이 필요하다. 단순히 책 내용을 묻는 것보다, 아이의 감정과 상상에 기반한 질문이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만약 너도 주인공처럼 그 숲에 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네가 책 속 마을에 살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게 될까?”와 같은 질문은 단순한 대화 그 이상으로 놀이의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아이의 대답은 때로 엉뚱하고,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비논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만의 상상 구조가 있고, 그 상상은 놀이로 이어질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아이가 갑자기 상자 위에 올라가 "나는 지금 구름 위를 걷는 중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다. 그 순간 어른이 “거기에는 뭐가 보여?”라고 물으면 놀이의 세계는 더 풍부해진다.
이처럼 질문은 놀이를 유도하는 도구이자 아이의 내면을 탐색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질문을 잘 던지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책을 통해 얻은 자극을 자기식의 놀이로 발전시킬 수 있다.
놀이의 결과를 기록하지 말고 과정에 주목하기
많은 부모는 독후활동 이후 무언가 결과물을 남기고 싶어한다. 예쁜 독서록, 잘 정리된 만들기, 깔끔한 그림 등은 아이의 성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의 자발적인 놀이에는 이런 결과가 방해가 되기도 한다.
놀이의 본질은 즉흥성이고 자유로움이다. 아이가 오늘은 종이컵을 탑처럼 쌓아놓고 그것을 ‘괴물 탑’이라고 불렀다면, 내일은 똑같은 종이컵을 ‘우주 기지’로 부를 수도 있다. 어른이 “그걸 그림으로 그려볼래?” 혹은 “글로 써볼까?”라고 계속 유도하면 놀이의 흐름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놀이를 만들었는지를 관찰해보자. 어떤 장면에서 상상력이 시작되었는지, 무엇을 만들며 웃었고 어떤 부분에서 집중했는지를 눈여겨보면, 아이의 사고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놀이의 결과보다 그 흐름 자체가 아이의 두뇌 발달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혼자 노는 시간을 허용하는 용기
마지막으로, 아이가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혼자 노는 시간’이다. 많은 부모가 아이가 혼자 있으면 지루해하거나 학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아이가 상상을 키우고 놀이를 창조하는 골든타임이 될 수 있다.
특히 그림책을 읽은 직후 조용한 시간을 주면 아이는 책 속 이야기를 스스로 되새기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확장시켜나간다. 그 확장의 방향은 꼭 만들기나 말하기일 필요도 없다. 혼자 중얼거리며 역할놀이를 하거나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훌륭한 창의적 활동이다.
부모는 뒤에서 지켜보되, 평가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 놀이에 참여하고 싶다면 아이가 초대한 경우에만 살짝 참여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이가 스스로 만든 세계를 존중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무리
그림책은 단순한 읽기 자료가 아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질문을 던지고, 세계를 다시 구성해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출발점이다. 그 마법은 아이가 스스로 놀이를 창조해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부모와 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역할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율적으로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는 아이는 단지 재미를 위해 노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아이는 문제를 해결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사고 훈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책 한 권과 약간의 여유만 있다면, 아이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요한 건 아이의 상상에 귀 기울이고, 그 세계가 존중받을 수 있는 공간을 함께 지켜주는 것이다.